Jiyoung Kim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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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의 회화: 고독, 부조리와 존재론적 자의식
- 고충환(미술평론)프랑스의 미학자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이 고독한 이유를 불연속적인 존재성에서 찾는다. 인간은 원래 삶과 죽음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완전하고 자족적인 존재성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문명화되고 제도화된 삶을 살면서 그 연결된 고리는 끊어진다.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연결된 끈이 단절되면서 처음의 연속적 존재성을 잃고 불연속적 존재로 추락하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미덕이 되고 죽음은 금기시된다. 그리고 죽음은 주체의 시각에서 볼 때 금기의 최대치를 실현하고 있는 지극한 타자와 동일시된다. 여기서 타자는 단순히 주체와 비교되는 객체 이상의, 모든 이질적이고 낯 설은 것들, 생경하고 다른 것들, 금기시되고 터부시되는 것들을 아우른다. 이렇게 삶은 죽음과 단절되고 주체와 타자가 고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이, 주체와 타자가 서로 맞잡을 수 없는 불연속적인 존재성이 인간의 보편조건인 한, 인간이 고독한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고독을 끝장내는(지양 즉 넘어서면서 취하는) 유일한 방법은 금기를 넘어 죽음을, 타자를, 어둠을 끌어안음으로써 재차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자기 내면의 심연과 대면하도록 요구해온다.
김지영의 그림은 이렇듯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고독과 대면하는 투명하고 명징한 의식을 엿보게 하며, 이를 통해 고독과 화해하는 과정에 동참하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한다. 비록 고독 자체는 어둠이지만, 그 심연의 방, 무의식의 방, 자의식의 방은 작가의 의식에 의해 깊고 투명하게 빛난다.김지영의 그림은 외관상 재현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허허로운 화면 위로 비정형의 얼룩들이 흘러내리는가 하면, 거친 붓 자국과 나이프로 덧발라 올린 상대적으로 정제된 느낌의 형상이 서로 어우러진다. 이런 유기적인 형상과 더불어 아마도 테이프를 사용했을 듯싶은 기하학적인 선이나 면이 중첩되면서 화면에 일정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화면 내에서 유기적인 형상과 기하학적인 형상은 서로 중첩되거나 어우러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사이 공간을 경계로 서로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순수한 조형요소나 형식요소에 의해 견인된 추상미술일까도 싶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느낌의 색조가 서정적인 인상을 자아내는가 하면, 정적인 화면 너머로까지 침윤된 번짐 효과가 비정형의 얼룩과 어우러져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재차 재현적인 방법을 취하는 셈인데, 그러나 이때의 재현은 사물의 감각적 닮은꼴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연상적인 것에 가깝다. 비정형의 얼룩들이 불러일으키는 암시적인 풍경이라고나 할까.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벽에 난 얼룩자국에서 홍수를 보고, 파도를 보고, 심연을 보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일단 집요한 시각에 포섭된 모든 무의미한 것들은 의미 있는 것들로서 탈바꿈된다. 바로 암시력과 투시력이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정작 사물에 속해져있는 성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체의 시각과 더 깊이 관련된다. 무의미한 것들이 그 속에 품고 있는 의미나 한갓 얼룩에 내재된 세계를 발견하고 캐내려는 의지에 수반되는 집요함과 철저함으로써 판타지를, 비전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이를 하이데거의 논법을 빌리자면 ‘세계의 개시’가 될 것이다.
이렇게 허허로운 화면은 여백처럼 보이고, 수면처럼 보이고, 심연처럼 보인다. 화면 아래쪽에 치우쳐져 있거나 화면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선은 수평선처럼 보이고, 산과 하늘을 구획하는 공지선처럼 보인다. 기하학적 형상들 또한 방파제를 닮았는가 하면, 곧게 뻗은 길을 떠올려주고, 문이나 통로 혹은 터널과 계단을 상기시킨다. 마인드스케이프 즉 일종의 내면적 풍경이나 심의적 풍경으로 부를만한 경계가 열리는 것이다. 특히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내면적인 풍경이 되게끔 해주는 것은 문과 통로, 터널과 계단과 같은 심리적인 정황을 대변해주는 상징적 모티브들이다. 도상학적으로 이 모티브들은 정화의식, 통과의례, 성인식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이곳으로부터 저곳으로 건너가는 경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자기부정에 바탕을 둔 거듭남의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주체와 타자의 구분을 허문다.
이처럼 그림을 작가의 사사로운 심리적 정황이 투사된 내면적 풍경으로 읽을 때 특히 눈에 띄는 모티브가 있는데,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아득한 느낌의 심연이나 수면을 떠올리게 하는 화면 여기저기에 고립된 섬처럼 부유하고 있는 비정형의 덩어리들이다. 그 유기적인 형상들이 화면 내에서 기하학적 형태와 대치하고 있기도 하고, 둘 이상의 크고 작은 형상들이 서로 동떨어져 마주하고 있거나 한다. 그 형상들은 각각 주체와 타자에 해당하며, 이를 통해 주체와 타자와의 상호관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추상적인 화면과 유기적인 형태에다 주체의식이나 자의식을 투사한 일종의 상징적 문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는 그 이면에 고독을 내재화한 고립된 섬으로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섬은 외관상 육지와 단절돼 있을 뿐, 사실은 수면 밑바닥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 이는 그대로 주체와 타자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를 말해준다. 즉 서로 동떨어진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자기보존 욕망)과 함께 정작 소외를 두려워하는 심리적 정황(타자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힘에 의해 견인되는 인간의 실존적 존재조건을, 그 불안의식을 엿보게 한다. 심지어 새들조차도 적절한 자기 활동영역이 확보되지 않으면 서로 싸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독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고독을 두려워하는 이율배반성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속성이 아닐까. 인간이란 아마도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할 때, 그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존재조건과 불안의식을 끌어안을 때 비로소 그 구체적 형상을 얻는 어떤 경지 혹은 경계일 것이다.
이와 함께 주체를 상징하는 유기적인 덩어리를 보면, 나이프로 두툼하게 발라 올린 자잘한 형상들이 중첩돼 있다. 그 형상이 주체의 다면성을, 주체의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결을 엿보게 한다. 자아, 주체, 에고, 나라고 부를 수 있는 통일된 전제나 실체 같은 것은 없다. 단일의 주체 대신 복수의 주체들이 나를, 나의 인격을 구성한다. 나는 온갖 이질적인 것들, 서로 다르고 차이 나는 것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질 들뢰즈의 논법으로 치자면 나는 마치 주름과도 같은 것, 즉 표면에 드러난 의식의 지층(내가 인식할 수 있는 지층)과 그 이면에 포개어진 무의식의 지층(내가 인식할 수 없는 지층)으로서 구조화돼 있다. 나에 관한한 심지어 자신조차도 모르는 이물질, 불순물, 타자가 나와 함께 섞여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파편화된 주체, 부유하는 주체, 우연한 주체를 인정하는 후기 근대적 주체의식과 자의식을 주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김지영의 그림은 암시적인 만큼이나 시적이고 서정적인 채취가 짙게 묻어나오는 화면을 통해 인간의 부조리 의식을 감각적으로 전달해준다. 즉 고독을 향유하면서 두려워하는, 소외를 통해 자기를 보존하면서 불안의식을 내재화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속성인 이율배반성을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