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young Kim 김하영
-
김하영의 에코 블루: 심연에서 날아오르다
-조은정 (미술평론가)
김하영의 최근작은 반복과 깊이라는 이전 작품과의 연계선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좀더 깊은 개인적인 의미의 확장선에서 이해된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낯설음, 팽팽함, 아름다움 등의 언어로 설명했던 것과는 달리 최근작에서는 깊이와 조화 그리고 내적 욕망을 확연히 드러내놓는다.
에코 블루
그의 화면은 중첩된 이미지와 우러나는 색으로 구성된다. 먼저 판화지에 디지털 이미지를 조합하여 실크스크린으로 형태를 입힌 뒤 20여 회 이상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밑그림을 드러나게 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인 화면은 색깔로 이루어진 단순한 색면이 아니라 색의 층이 된다. 반복을 통해 구축된 색은 하나의 계열, 예를 들어 작가에 의해 선택된 파랑은 파랑이라는 하나의 시각적 파장을 넘어 색이 의미하는 사회적 내용을 그 안에 담게 된다. 신체성이 묻어 있는 색에서 관객은 작가의 주장에 맞닥뜨려지기 때문이다.
김하영의 <에코 블루> 시리즈가 단순히 깊은 파랑이라는 색의 의미를 넘어 자연, 생활, 가치 등을 의미하는 코드로 읽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신체성에 기인한다. 괴테의 <색채론>이 인상적이라는 작가는 광학적인 측면보다 색채의 심리성을 충실히 이행한다. 따라서 그가 생산한 에코 블루는 신체성이 가미된 자연과 평화, 기리고 근원적인 것에 대한 추구의 과정을 시각화한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파랑색이 지니는 필연적인 속성인 물의 이미지를 취득하게 되어 모든 생명의 근원인 바다와 여성성 그리고 보다 확산된 무한의 우주를 상징하게 된다.
파랑색의 에코 블루 시리즈는 작가의 작업 목적이 ‘사람들의 치유’에 있다고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무한한 여성성으로 감성에 젖어들게 하는 힘이 있다. 미래지향적이며 무한한 우주를 의미하는 파랑색은 한편 우울한 색이라고도 한다. 이중성을 지닌 색이라는 의미인데 안정을 추구하는 색은 역으로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정의 상대적 위치에 있는 운동이란 측면에서 파랑은 근본이자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공기, 바람, 물을 의미하는 화면이 제시된다.
이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표현은 경험의 시각화를 통해 나타난다. 수력발전을 위한 거대한 프로펠러를 통해서는 바람을 본다. 화면 아래쪽의 일렁이는 잔물결과 상단의 주황빛 경계를 통해 빛이 쏟아지는 심연인 물을 보며, 부정형 입체물의 부유를 통해 신선한 대기의 흐름인 공기도 ‘본다’. 그의 화면은 촉각의 시각화라는 한계를 넘어 공감각적이며, 온몸에 느껴지는 감각을 시각적으로 변화시켜 무한히 증식시킨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생명성, 여성성은 바로 이러한 증식의 한 반향일 것이다.
<에코블루-여섯 개의 시선>은 6이라는 숫자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 더하여 세상을 조응하는 작가의 시선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화면 위에 얹힌 6개의 도형은 결코 수학적인 입체가 아닌 형태이다. 어디인지 불완전해보이며 따라서 계속 증식하는 듯이 보이는 입체는 작가의 노동력에 의해 탄생된 가는 선으로 이루어진 입체이다. 색연필로 그리고 고정시키고 또 지우고 다시 그어 완성을 향하는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입체는 스며드는 세계, 규정되지 않은 형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빛을 상상케 한다. 광석 이를테면 다이아몬드 같은 견고하고 반짝이는 것의 형태로도 인식되는 입체들은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색과 형태 그리고 중첩의 노동에 의해 확고한 형태로 나타난다.
대지와 중력
<초록빛 Tara>는 자연을 의미하는 초록색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파랑과 초록의 경계에서 자연의 터치라고도 할 수 있는 식물을 상기시키는 색들은 물과 땅의 경계, 물을 담은 대지의 힘을 보여준다. 대지는 모든 것을 숨겨주고 또 품에 안는다. 그런 면에서 김하영의 <초록빛 Tara>는 목신을 거부한 죄로 목동들에 의해 갈갈이 찢겨죽은 님프의 육신을 숨겨준 존재이자 님프의 잔향인 메아리도 감내하는 존재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무한한 깊이, 마치 블랙홀 같은 공간에 뜬 도형은 그러한 존재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중력>은 회색이 주조를 이룬다. 영어에서 gravity 혹은 gravitation인 중력과 회색인 gray가 비슷한 느낌의 단어여서 회색을 사용하였다는 화면은 여느 화면보다 많은 형상들이 떠 있다. 부유하는 형태들은 넓은 화면에 비해 작은 면이지만 견고하고 불투명하여 무게감을 인지시킨다.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도형들 속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은 색채를 보며 작가가 추구하는 생활의 균형을 본다.
우리 시대에 작가로 살기, 한국에서 여성작가로 살기라는 문제에 직면한 수많은 여성작가들이 지나온 하룻밤 새 교차하는 좌절과 희열을 그도 맛보았을 것이다. 그림 그리는 행위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자 끝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되는 것은 사랑스런 아이의 콧물을 닦아 주어야만 해서도, 밀린 설거지가 마음에 걸려서만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일상의 무게를 지나 존재 자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 그리고 자연과 대면한 인간의 삶에 대한 무게를 그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구현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 그러한 삶이나 생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한 작업임을 화면의 가장 바탕이 되는 디지털 이미지가 하단에는 누워 있는 여성의 실루엣이, 상단에는 둥근 공간 안에서 비상하는 새의 이미지를 노골화함으로써 강조한다.
불, 공기, 땅을 상기시키는 견고한 광석이 우주에 삼단으로 구성된 형태나 푸른 화면에 무한히 증식되는 이 부정형이지만 견고한 형태들은 작가의 시선이 높은 곳, 깊은 성찰을 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눈물의 여왕
보라색 하단에 짙은 파랑을 뚫고 비상(飛上)하는 새가 있는 부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색채가 눈부신 화면은 <눈물의 여왕>이다. 자신의 개인전에는 반드시 등장한다는 동일제목의 작품들은 작가의 심정을 극명히 드러내놓는 작품이다.
자연의 흐름과 진리에 대해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 작가는 스스로 ‘모범적인’ 생활인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한국에서, 여성 작가로 살기의 문제가 부상한다. 사람좋은 웃음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품이 결코 까칠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임을 가는 연필선이 결코 신경질적이지 않은 화면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깊은 푸른색이 고독의 색임을 상기한다면, 한번 터뜨린 울음은 3일은 되어야 멈춘다는 작가의 힘겨운 자기 세우기가 이 작품에 스며있다.
눈물은 모든 것을 정화시킨다. 그리고 푸른 물도, 깊은 어둠을 감춘 우주도 이 세상의 모든 인간적인 것을 하잘것없게 만든다. 그 하릴없음에 대한 단상, 지고한 힘에 대한 성찰 그리고 그 기록으로서 자연의 움직임과 변화에 대한 기록이라는 측면 이외에 김하영의 작업은 개인적 감정에 충실한 자기 기록의 성격을 지닌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사회적으로 보이는 이 현상은 깊고 푸른 화면에서 부상하는 형태들 속에서 빛을 발한다.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눈물의 힘은 무엇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고, 존재를 존재로서 그 자리에 있게 하는 것, 아무리 찰라여서 고정된 형태로 규정지을 수 없다고 해도 그렇게 있기는 했었던 것에 대한 단상을 그의 화면에서 본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덧없음을 찬탄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경탄이라네. 우리가 원현상을 보고 경탄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네. 더 높은 것은 허락되지도 않고, 더 이상의 것도 그 뒤에서 찾을 수 없으니 말이지. 이것이 한계라네. 하지만 원현상을 목도한 인간들은 보통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네.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난 후 즉시에 뒤집어서 그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려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말일세.”라는 괴테의 글 앞에서도 초연히 색에 대해, 형상에 대해 그 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이 또한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존재의 한 방식임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