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  시와 시각 - 김영서 시에 부치는 우혜빈 일러스트 전  ]   


“시는 말하는 그림이며, 그림은 말 없는 시”라고 말한 기원전 5~6세기 그리스의 서정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와 동양미학의 시화일체(詩畵一體)는 시와 그림의 관계를 논할 때마다 언급된다. 수묵화 속에 시를 쓰고 시 가운데 그림을 두기도 하며, 그림에 영감을 받아 시를 쓰고 시를 읽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마네가 그린 스페인 무용수의 초상화 [롤라 드 발랑스, 1862]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쓰고, 쿠르베는 보들레르의 초상화를 그리고, 데이비드 호크니는 시가 작품의 오랜 원동력이라고 최근의 한 회고전에서 말하며, 가깝게는 김남조 시인의 미수(米壽)를 기념해 중견 미술작가 여러 명이 작업을 만들고 전시를 하기도 했다.

순수회화를 넘어 응용미술로 올 때 시와 응용미술은 더욱 밀착된다. 삽화가 그러하다. 글의 이해를 돕거나 시각적 아름다움을 위해 그려지는 삽화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와 성경 필사본의 삽화에서처럼 인류기록의 시작부터 함께하며, 책의 대량인쇄가 가능한 후로 삽화는 더욱 견고하고 독자적인 예술장르가 되는 것이다.

김영서 시인은 순천향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했고, 현재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시를 쓰고 있다. 세 아들을 둔 중년의 가장인 시인은 실직과 재취업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그리고 천안이라는 도시와 농촌이 혼재하는 환경에서 획득한 체험과 관찰을 두 권의 시집, [언제였을까 사람을 앞에 세웠던 일이 (시로 여는 세상, 서울, 2006)], [그늘을 베고 눕다 (시로 여는 세상, 서울, 2011)]에 녹여내고 있다. 일관된 따뜻한 시선으로 말이다. 우혜빈 디자이너는 현재 백석문화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으로, 지인의 소개로 김영서 시인의 시집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충청남도 천안이라는 공간이 이 두 사람의 공통분모라지만, 이제 갓 스물에 접어든 감각적 디지털 세대의 디자이너가 중년 시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죄책감과 외로움을 그림에 녹여 표현하려” 했다니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더구나 시인의 시집은 이미 출간된 것이고 어떤 삽화 의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자신이 읽고 느낀 문학작품을 시각화해보고 싶다는 젊고 순수한 의지가 느껴지는 시도인 셈이다.

“용역 사무실에는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문이 있는데 /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날은 / 하루를 유령으로 살아야 했다 / … / 집으로 가는데 어둠 속으로 내 그림자가 사라졌다 /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 나도 한때는 유령이었다 中

‘나도 한때는 유령이었다’에 붙이는 우혜빈 작가의 삽화에서, 존재감을 잃은 ‘나’와 다른 유령들은 거리를 걸어 나오고 있다. 정사각형의 기하학적 머리들은 건물의 기하학과 맞물려 도시의 혼동스러움을 표현하는 동시에 인물의 어두운 표정을, 삶의 무게감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비를 만나 / 몸살 났는데 / 아내는 우산 탓을 한다 / 알고 있다 / 나는 아내의 우산이 되어 본 적이 없다” - 아내의 우산 全文

‘아내의 우산’에 붙이는 삽화는 요즘말로 ‘웃프다’. 시도 그러하고 그림도 그러하다. 애초부터 우산의 기능이 없는 막대기와 고개를 살짝 기운 여인의 뒷모습이 비를 맞고 있다. 여인은 우산을 치켜들어 비를 막아보려는 의지가 없다. 다시 보니, 살만 남은 우산이 여인의 옆에 딱 붙어 서있는 것이 아닌가.

[詩와 視覺] 전에서 우혜빈 디자이너는 ‘산삼 감정’, ‘나도 한때는 유령이었다’, ‘벙어리장갑’, ‘아내의 우산’, ‘영역’, ‘나비' 등 시에 붙여 6점의 일러스트 작품을 선보인다. 젊은 감성이 느껴지는 간결하고 산뜻한, 하지만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단순한 삽화의 전시가 아니라, 시는 전시장 벽에 새겨지고 작품은 설치적 요소와 함께 어울러질 예정이다. - 옆집갤러리


---------------------------------------------------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중턱에 지인에게서 시집 두 권을 받았습니다. 흥미가 생긴 저는 시집을 차근차근 읽어나갔습니다. 두 권의 시집에서 우선 마음에 드는 시 여섯 편을 골라 제 나름대로 시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산삼 감정’, ‘나도 한때는 유령이었다’, ‘벙어리장갑’, ‘아내의 우산’, ‘영역’, ‘나비'에서 배어나는 김영서 시인의 특유한 분위기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쓸쓸한 분위기나 은근한 죄책감, 외로움 등이 읽는 시의 구절에서,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아내의 우산’ 중 “알고 있다 / 나는 아내의 우산이 되어 본 적이 없다”라거나 ‘나도 한때는 유령이었다’ 중 “집으로 가는데 어둠 속으로 내 그림자가 사라졌다 /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라는 구절에서 느껴지는 죄책감과 외로움을 그림에 녹여 표현하려 했습니다.

초보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의 다양한 방향을 공부하고 있는 중 하나의 의미 있는 경험을 쌓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기회를 만들어 다양한 디자인적 접근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詩와 視覺] 전을 열며 꿈꿔왔던 목표에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 2015년 5월 우혜빈

* 우혜빈 작가는 현재 백석문화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으며, 첫번째 개인전 [詩와 視覺]에서 일러스트 작품을 선보인다.

---------------------------------------------------

나도 한때는 유령이었다

김영서

출근길에 용역 사무실을 나서는 이웃과 마주쳤다
서로 눈이 마주치지 않는 배려를 했다
직장에서 사표를 던지고 나올 때도 그랬다
용역 사무실에는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문이 있는데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날은
하루를 유령으로 살아야 했다
출근한다고 집에서 나왔을 때도 그랬다
궂은날인데 거리는 유령들로 가득했다
해가 질 때까지 둑길을 걸었다
작은 혼령들이 집에 들어갈 시간이라고 속삭인다
발밑의 밥풀꽃이 그곳을 지나는 바람이
잔가지 사이를 폴폴대는 새가 그랬다
집으로 가는데 어둠 속으로 내 그림자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벙어리장갑

김영서

나를 기억하는 손은 없나
바자회에 남아 있는 벙어리장갑
그 속에 담겨 있던 평온을 잊었나
잊었다면 의도적이었나
한 번쯤 고맙다는 말 못 하고 나이 먹은
손을 들여다본다
부드러운 손이 거칠어지고
투박한 손이 다시 고와지는 이유를
생각해 내지는 못했다
유품으로 벙어리 장갑을 내놓은 사진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 김영서 시인은 1964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2005년 계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언제였을까 사람을 앞에 세웠던 일이 (시로 여는 세상, 서울, 2006)], [그늘을 베고 눕다 (시로 여는 세상, 서울, 2011)]이 있다. 순천향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한서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



















 

Writer profile
Next Door Gallery 옆집갤러리

갤러리 / 현대미술/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 미술품 전시 및 판매
2015/05/15 14:58 2015/05/15 1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