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young Son  손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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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론으로서의 퍼즐, 존재론으로서의 퍼즐

- 고충환 (미술평론)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치유하는 과정 중에 퍼즐 맞추기가 있다. 이 치유법은 환자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조각난 기억의 편린들을 짜 맞춰 복원케 하며, 이질적인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에의 인식을 재생시켜준다. 그들에게 퍼즐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한 미증유의 세계, 이질적인 것들이 유기적인 관계의 망으로 구조화되기 이전의 파편화된 세계로서 다가온다. 그러니까 세계의 시초, 카오스, 의식의 영도(零度) 지점을 상징하며, 그 원료(세계의 원료)를 짜 맞춰 구조화하는(질서를 부여하는) 그들의 손길(의식의 손길)은 그대로 창조주, 연금술사, 예술가의 손길과 흡사하다.
정신병은 이처럼 수수께끼로 중첩된 세계의 구조를 좀 더 가까이에서 투명하게 대면하는 증상 혹은 징후 혹은 의지에 다름 아니다. 세계의 지층은 수수께끼로 구조화돼 있으며, 합리와 상식, 선입견과 편견이 그 표면을 뒤덮고 있다. 이 친근한 표면의 더께를 걷어내면 그대로 세계의 수수께끼가 드러나고, 의식의 더께를 걷어내면 무의식의 지층이 드러난다. 정신병자와 예술가는 이렇게 드러나 보이는 세계의 어둠, 무질서, 욕망과 직면하려는 의지 혹은 충동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질료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사용해서 자기 내부로부터 하나의 세계를 오롯이 세운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그들에게 퍼즐 맞추기란 지워진 길을 복원하는 행위이며,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되었거나 없었을 길을 되찾아가는 과정이며, 예술(상상력)이라는 주관적인 도구로써 세계를 재구조화하는 실천논리에 다름 아니다.
손원영은 퍼즐을 차용한다. 그의 작업에서 퍼즐은 먼저 형식으로서 드러나고, 그리고 의미로서 확인된다. 퍼즐은 그 이면에 수수께끼로 축조된 세계에 대한 인식을 숨기고 있다. 그의 작업은 세계의 어둠, 무질서, 욕망과 대면케 하며, 그 세계 속의 잘못된 길, 지워진 길, 없는 길과 직면케 한다. 그리고 바른 길(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길, 주관적인 길)을 복원시켜주는데, 이때 그 과정이나 방법이 정념적이기 보다는 논리적이고, 무겁기보다는 가볍다. 그 가벼움은 가벼움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무겁고(이를테면 인간의 실존적 조건 같은) 진지한 것(이를테면 세계의 구조와 같은)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방법일 뿐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아이러니 화법에 의해 견인되고 있으며, 여기서 작품의 독특한 아우라가 발생한다.
퍼즐이 저부조의 형식으로 만들어지는가 하면(릴리프 퍼즐), 사실적이고 재현적인 이미지 위에 덧그려지기도 한다(드로잉 퍼즐). 퍼즐조각들이 전체 이미지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가 하면, 전체 이미지와는 별개로 스스로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의도적인 일탈이 강조될 때조차 큰 틀 안에서는 부분 이미지로서의 퍼즐조각이 모여 하나의 상을 이루는 유기적이고 연속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이로써 손원영의 작업은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주지시키며, 그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도 관계에 대한 인식을 주지시킨다. 그 관계란 말하자면 주체와 타자, 음과 양, 의식과 무의식처럼 온갖 이질적인 것, 차이 나는 것, 타자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존재하게끔 유도하는 일종의 통합의 원리, 통섭의 원리를 일컫는다. 음은 양에 의해 비로소 그 형식을 얻게 되고, 양은 음에 의해 그 실체를 얻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너와의 상호 영향관계 내지는 상호내포적인 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그 진정한 실체를 얻게 된다. 주체(전체적인 이미지)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타자들(퍼즐조각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의해서만 비로소 정의되는 주체란 바람이 흔들리는 나뭇잎에 의해 그 실체를 얻는 것과 같다. 나는 일종의 전망이거나 비전이며, 그 전망 속에는 네가 들어와 있고, 마찬가지로 너의 전망 속엔 내가 내재돼 있다.
이러한 사실의 인식 즉 주체와 타자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작가의 작업 가운데 특히 자신의 신체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 보다 적극적인 형식을 획득한다. 자신의 신체 위에 마치 문신을 새기듯 퍼즐조각을 그려 넣은 이 작품에서 퍼즐조각들은 그대로 타자로부터 건너온 것, 나를 구성하는 타자의 요소들을 암시한다. 나 곧 주체란 말하자면 타자의 요소들(퍼즐 조각들)로써 구조화된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릴리프 퍼즐이나 드로잉 퍼즐 그리고 이 모두를 혼용한 퍼즐 작업으로써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며, 주체와 타자와의 상호 영향(사)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여기서 퍼즐은 하나의 세계, 대상, 물체, 객체를 이루는 이미지의 최소단위원소, 입자, 모나드, 단자에 해당하며, 그 이면에는 부분들의 집합으로써 구조화된 세계에 대한 인식론(특히 원자론이나 알 신화와 관련한)과 함께, 특히 이미지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의식이 깔려있다. 퍼즐조각을 이미지의 최소단위원소와 동일시하는 작가의 발상이나 태도는 말하자면 인상파 화가들의 색점이나 인쇄물의 망점, TV 주사선의 광점이나 디지털 미디어의 픽셀 이미지가 갖는 의미와 일면 통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 중에서 특히 한눈에 디지털 영상을 떠올리게 하는, 사실적이면서도 부드러운 톤의 자연 이미지를 소재로 한 일련의 그림들이 이런 픽셀 이미지와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편이다. 주로 만개한 꽃잎의 표면에 덧그린 픽셀(퍼즐) 이미지는 규칙적이고 연속적인 패턴으로 인해 기계적인 느낌을 주며, 실낱같이 얽혀있는 섬세한 망구조가 육안으론 알아볼 수 없는 유기체의 섬유질 구조나 그 결정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꽃잎의 감각적 표면현상을 넘어 그 이면의 구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의해서나 가능할 법한 이 이미지가 그러나 정작 일일이 손으로 그려서 재현한 것이란 점에서 작가는 아날로그적인 방식과 디지털적인 감성(디지털 매체에 의해 포착되고 재해석된 세계의 상)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형적인 회화의 방법론을 유지하고 심화하고 다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그만큼 더 신뢰감을 얻고 있다.
이외에도 미술사를 차용한 손원영의 근작을 보면 단순한 패러디의 경우를 넘어서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상파 화가들은 하나의 이미지가 사실은 이질적인 색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터치들이 중첩된 무의미한 얼룩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거리를 갖고 보면 색점들이 서로 어우러져 비로소 하나의 상으로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부분들(터치와 색점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이러한 인식은 이후 기계복제 시대의 망점과 전자복제 시대의 광점, 그리고 디지털 매체에 의해 지지되는 가상현실시대의 픽셀 이미지에로 연이어지고 변주된다. 결국 작가가 미술사 중에서도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차용한 이면에는 그로부터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찾아가는 퍼즐작업의 사실상의 뿌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손원영의 근작에는 현대미술과 관련한 진정한 회화성 혹은 그 근원으로 부를 만한 현상과 대면하고 그 성과를 자기화하려는 자의식이 반영돼 있다. 이를 통해 미술사를 사용하는 다른 방식, 다른 가능성의 지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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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5 21:10 2010/03/15 2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