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내 심장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만 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아네" -1842년 11월 헤겔이 횔덜린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점심식사는 아주 좋았다. 살짝 익힌 달걀 두 개와 기름에 튀긴 감자와 콩을 먹었으니까. 나는 콩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은 메마르다. 나는 마른 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속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니진스키의 일기 <영혼의 절규> 중에서-
마치 자신이 ‘생명’을 노래해야만 하는 예술가여야 함을 에둘러 직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니진스키의 일기 <영혼의 절규>는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이다. 뒤의 문장이 앞의 문장을 지속적으로 배반하거나 부정하는 형식으로 쓰인 그의 일기는 정신분열적인 동시에 나르시시즘적이고, 자가성애적(auto-eroticism)의 극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춤처럼 일기는 마치 죽음 충동으로 가기 전 극단의 몸부림에 가까운, 확실히 이드적 파토스의 파열과 같은 느낌이다. 나로서는 니진스키의 파토스적 삶이 너무 강력했고 뜨거웠고 두려웠기 때문에, 그를 만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에 대한 나의 선망과 시기에 근간한 회피의 메커니즘은 박정국이라는 작가를 만나면서 대면의 메커니즘으로 바뀌었다. 억압된 것의 귀환! 박정국을 만나면서, 나는 그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의식의 평면성과 메마름 때문에 자괴감 비슷한 증환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온 날 저녁, 나는 니진스키를 꺼내들었다. 언제부턴지 생겨난 이상한 버릇이다. 그 작가와 전혀 상반되는 글이나 삶을 읽는다는 것! 아마 나의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리라.
나의 이런 무의식적 행동은 늘 내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해준다. 박정국과 니진스키, 니진스키와 나, 나와 박정국은 ‘객관적 우연’에 의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났다. ‘객관적 우연’이란 어떤 대상을 우연히 선택한 것일지언정 그것은 이미 ‘내적 필연성’이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라는 암시이다. 사실 표면적으로 둘 사이에는 아무 연관성도 없으며, 유사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니진스키와 박정국은 멀어도 너무 멀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다. 니진스키는 박정국이 억압한 타자이자 소외시킨 얼터에고(alter-ego)일지도 모른다. 아마 박정국도 니진스키의 정신분열적 삶과 예술에 공감할 것이다. 둘이 거울단계로 퇴행하면 한 몸이었을 테니까, 에로틱하게도 말이다.
첫 번째 상상: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박정국은 집(화면을 가득 메운 큰 집, 붉은색 집, 창문이 없는 집), 사람(집에서 나온 호스를 든 남자, 양복을 입은 남자, 무엇인가를 심는 여자), 동물(기린, 붉은 발 갈퀴를 가진 새), 녹색식물, 뿔 등을 그린다. 그가 그려내는 장면들은 딱히 아름답지도, 도발적이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집들과 등장인물들은 무언가 좀 위축되어 있고, 무엇인가 좀 은폐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그보다는 낯익은 동시에 낯설다는 느낌이 좀 더 근접한 표현이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여기에서 우리는 편안하고 따스한 의미였던 집(homely)이 어느 순간 비밀스럽고 감춰진 것이자 공포스러운 ‘집 같지 않은 집’(unhomely)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
이처럼 박정국이 만들어내는 집은 동전의 양면 같은 두 가지 메타포를 동시에 지닌다. 집의 외부(혹은 외양)는 아버지의 법과 질서로 세워진 상징계적(초자아적) 삶을 대변하는 동시에, 집의 내부는 상징계로 오기 위해 억압해야만 했던, 어머니와 나의 구분이 없었던 평화롭고 행복했던 상상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집의 외부는 빈틈없이 깨끗하고, 딱딱하고 건조하며, 질서정연하고, 때론 상상계의 구멍조차 허용하질 않을 정도로, 출입구가 없거나 작으며, 게다가 창문조차 막혀있을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 집은 법과 사회와 제도에 순응해야하는 억압된 작가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집 자체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작가가 근본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코라(chora, 일종의 자궁)와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박정국에게 집은 상상계와 상징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는 이율배반적인 장소로서 기능한다. 박정국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에서 귀환하는 실재계를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기린(그 기이한 형상으로써 이방인이자 타자인 작가자신의 분신인 것으로 보이는)을 포함한 낯선 등장인물들은 평화로움과 단조로움을 가장한 우리 삶에 문득문득 찾아오는 그림자로서의 죽음, 혼돈, 이방인, 저승사자, 분신, 도플갱어 같은 실재계의 귀환은 아닐까?
두 번째 상상: 무의식적인 것은 반복된다. 2)
박정국의 작품에는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집, 강박적으로 선을 긋고, 쌓아 올리는 벽돌로 된 집이 있다. 박정국의 이런 작업양태는 반복강박으로,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의 ‘포르트-다(fort-da)’ 게임3)을 연상시킨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18개월 된 손자가 어머니의 부재를 견디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포르트-다’ 놀이를 통해 반복강박의 적절한 실례를 제공한다. 이 놀이는 모든 반복적 표상의 심리적 기초를 보여준다. 이 놀이가 아이에게 엄마의 상실을, 즉 문명이 요구하는 ‘본능의 포기’를 보상해주는 독창적인 수단이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그저 스쳐 지나치기 쉬운 아이의 게임에서 발견한 것은 어머니의 부재라는 현실을 견디어내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었다. 프로이트는 이 고통스러운 경험의 반복-아마 작가도 유년시절 이와 같은 경험이 주주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이 어떻게 하나의 놀이로써 쾌락원칙과 일치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어머니의 떠나감은 즐겁게 돌아올 것에 대한 필수적 예비조치로써 상연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 놀이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즉 어머니의 즐거운 귀환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박정국이 강박적으로 벽돌을 쌓고, 집을 만드는 일은, 마치 자신의 고통스러운 체험을 놀이로 바꾸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처음엔 수동적인 경험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놀이로 반복함으로써 ‘능동적인’ 역할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술의 유희충동에 깔려있기 마련인 들뢰즈적 ‘아이-되기’의 하나의 버전인 셈이다. 그리하여 처음엔 고통스런 반복이었지만, 그것이 다른 종류의 일정량의 쾌락을 부여한다. 즉 어떤 체계에서는 불쾌한 것이 다른 체계에서는 쾌락일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반복은 결국 쾌와 불쾌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함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고통스러운 경험의 반복이 어떻게 쾌락원칙과 부합되는가라는 의문은 풀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복강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은 트라우마의 결과로 나타나는 반복적인 꿈에서 보여주듯이, 자아가 과도한 긴장을 제어한 다음, 그것을 ‘파편화’ 시키는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이를테면, 죽음충동4)을 삶충동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쾌락원칙 너머에는 죽음충동이 있지만, 이 죽음을 지연시키려는 삶본능 때문에 반복강박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반복충동은 죽음본능인 쾌락원칙을 넘어서 존재하는 삶의 본능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때로 그것이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막상 죽음이나 위기에 부딪히면, 그 반복이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고, 그 반복 자체가 곧 삶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은 어머니(대타자)5)를 기다리는 삶이다.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아이는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늘 상실한 어머니를 다시 만날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공허를 채워줄 것처럼 보이는 어떤 대상도 어머니는 아니다. 오직 죽음만이 공허와 불안과 두려움을 채워줄 수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세 상자의 주제>에서 죽음이 마지막 연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태어나서 죽기까지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바로 반복이다. 어머니라고 믿는 환상의 대상을 향해 가고 또 가는 반복이 삶이다. 그러한 반복은 어머니 없는 삶을 견디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영원한 연인의 메타포이자 영원한 갈증, 결코 채워지지도 가질 수도 없는 결여의 메타포이다. 박정국이 그려내는 알 수 없는 집들과 사람과 동물들은 그의 어머니로 대변되는 대타자와의 분리불안 강박을 조심스럽게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들이 갑작스럽게 무엇인가를, 하지만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상상: 자! 이제 저 베일을 벗기시오!
박정국은 화면 속에서 지속적으로 어떤 대상을 반복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안정감을 성취하는 듯 보인다. 더욱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집을 보면 안도감마저 든다. 그의 벽돌은 하나하나의 포르트-다 게임과 일치하며, 그리하여 탄생한 집은, 실재를 가리는 동시에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앤디 워홀의 작품에 나타나는 반복은 (지시대상)의 재현이나 (순수한 이미지, 즉 독립된 기표) 시뮬레이션이라는 의미에서의, 재생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반복은, 외상적인 것으로써 이해되는 실재적인 것을 가리기 위한(screen) 위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실재를 가리키고(point) 있다고 볼 수 있다. 6)
이와 관련하여, 우선되는 전제는 박정국의 작품을 보고 관자는 그 집 속에 무엇이 들었나를 궁금해 하는 것이며, 왜 집을 그렸을까하는 너무도 상투적인 질문들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트롱프뢰이유(눈속임그림) 논쟁을 들여다보자. 이 논쟁의 보편적 진실은 새의 눈을 속인 제욱시스보다 인간의 눈을 속인 파라시오스의 승리에 관한 것이다. 새의 눈을 속인 제욱시스는 의기양양하여 파라시오스에게 “자! 이제 당신 그림을 볼 차례요, 그 커튼을 열어보시오!” 라고 응수한다. 그러나 이 논쟁의 진전된 담론은, 파라시오스가 그린 것이 베일(veil, 장막)이었다는 점, 인간은 베일에 속는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인간이 베일에 속는다는 점이 우리에게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제욱시스의 트롱프뢰이유는 감각적 의식인 시선의 차원에 호소하는 기호를 바탕으로 동물들을 유혹하는 그림이라면, 파라시오스의 그림은 사람의 욕망을 유혹하는 그림으로써, 구체적인 기호가 아니라 ‘하나의 베일’만을 그림으로써 동료화가인 제욱시스 자신이 그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묻도록 자극하는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라캉에 따르면, 파라시오스의 그림에서는 시선의 시각이 파악할 수 없는 하나의 장막이 ‘응시를 잡는 덫’(a trap for gaze)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인간이 베일에 속는다는 것이 정확히 드러낸다. 이는 인간이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종”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인간이 '오브제 아'(objet a) 즉 환상대상에 속는다는 뜻이다. 만약 파라시오스가 베일을 그리지 않고 다른 어떤 사물, 예컨대 사람이나 꽃과 망치와 같은 정물을 그렸더라면, 제욱시스는 속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제욱시스의 시선은 그림을 보는 우리들의(아마 지식인) 일반적인 태도를 대변한다. 이 우화는 인간의 환상을 다루고 있는 의미심장한 메타포이다.
물론 박정국의 그림은 눈속임그림(트롱프뢰이유)이 아니다. 박정국의 작품을 보는 관자들은 제욱시스의 제안과는 좀 다르게 “저 집안을 보여주시오.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미치겠소!”라고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제안인가? 우리의 인식의 수준이 대부분 이렇다. 미하엘 하네케의 <히든>(Cache, 2005)을 보면서, 자꾸 “그런데 범인이 누구지?”라고 묻는 것과 같다. 7) 그 말은 결국, 박정국이 집을 그리지 않고, 꽃이나 나무나 산을 크게 그렸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배후를 캐묻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집이라는 매우 낯익은 동시에 낯선 대상을 그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어쩌면 집 혹은 벽돌이라는 베일이 전부일지 모른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있다면 그것은 죽음충동이 집약된 코라와 같은 의미에서의 집뿐이다. 베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박정국이 집을 반복해서 그려놓고, 그것을 마치 내러티브가 있는 양 늘어놓는다. 그러고는 이해가 될 만한 어떠한 단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그 작품은 박정국의 무의식을 떠나 관자에게서 자라나는 또 다른 상상적 내러티브가 된다. 그로써 내러티브가 있는 듯 보이는 것 역시 하나의 베일일 뿐이며, 베일은 오브제 아(objet a), 즉 환상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상, 베일은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꾸며대지만, 그 베일을 열면, 아무 것도 없거나 해골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부끼는 베일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환상을 가로지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차선 혹은 차악의 방법일지도 모르니까.
네 번째 상상 혹은 바람 : 삶은 환상보다 더 풍부한 것이다.
박정국은 자발적으로 나를 찾아온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만남에는 늘 평판, 소문, 명성이라는 중개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젊은 예술가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읽고, 에둘러 오지 않고 직진해 왔다. 모든 편지는 나에게 쓰는 것이다. 동시에 모든 편지는 도둑맞은 편지다. 이미 먼저 발견하고 공감하는 자의 것이니까 말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왔지만, 나는 그의 헐벗고 갈급한 심리적 아고니(agony) 상태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박정국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책무라든지, 타성에 젖은 안일한 작업태도라든지, 규범으로부터의 저항과 일탈이라든지, 진정한 작업에 대한 갈등과 고민과 같은 문제로 회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박정국은 화면의 결을 탐사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럼으로써 적절한 치유를 방기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표현할 줄 아는 ‘아이-되기’8)부터 실천해야 할 것이다. 누구(신, 부모, 사회, 국가, 제도, 미술계 등)의 명령도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안락하기보다는 외롭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들 없이 지내는 것이다.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강박적 트라우마와 콤플렉스 등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루만지고, 함께 잘 놀아야할 대상이다. 가능하다면, 그것을 예술로 현실화하는 작업이 승화라는 이름으로 재복귀하는 것이리라. 흥미롭게도 박정국은 이미 그 작업을 착수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의 목숨을 건 일탈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은 더 이상 일탈이 아닌 탈주로서, 긍정과 유희와 창조의 세계로의 입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인 동시에 자기세계를 갖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옆집갤러리>
---------------- 1) 이때 un은 억압의 의미를 내포한다. 메타포로서의 ‘집’을 억압하면, 기괴하고 낯선 집(존재)이 되는 것이다. 이 개념은 프로이트적으로 표현하면, 언캐니(uncanny: 낯설은 두려움 혹은 낯익은 낯설음)이다. 2) 라캉은 1964년 초 <무의식적인 것과 반복>이라는 세미나에서 트라우마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과의 어긋난 만남이라고 정의한다. 어긋난 것이기에 실재적인 것은 재현될 수 없고, 그것은 반복될 수 있을 뿐이며, 실은 반드시 반복될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즉 그에 의하면 “반복은 재생산이 아니다(reproduction)." 3) 프로이트는 반복강박에 대한 실례로서, 그의 18개월 된 손자가 실패에 매달린 끈을 가지고 만들어낸 ‘포르트-다’ 놀이를 든다. 아이는 어머니가 정기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포르트-다’ 놀이였다. 그 놀이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는 자주 실패를 집어던지고는 그것을 버리고 나서 안보이게 되면, ‘포르트’(fort! 저기로 가버렸네)라고 소리치고, 다시 줄로 실패를 당겨 원위치로 돌려서 그것이 보이게 되면 ‘다’(da! 여기 있구나!)라고 소리치며 기뻐했다. 그것은 사라짐과 돌아옴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놀이였다. 이렇게 하여 ‘포르트-다’ 놀이는 그 유명한 반복충동 이론을 낳는다. (S. Freud, ‘쾌락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1920]2003, p.280.) 4) 죽음 충동은 자살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가 태어난 바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 자극이 없는 열반의 세계와도 같은 곳 등을 의미한다. 죽음충동은 삶이라는 지루한 반복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가고픈 욕망을 의미한다. 5) 아이에게 처음으로 대타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어머니인데, 아이의 원초적인 울음과 특수한 메시지로서 그 울음을 사후적으로 확인하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이러한 대타자는 완벽하지도 않고 대타자에게 결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거세 콤플렉스가 형성된다. 6) 할 포스터, 실재의 귀환,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6]2003, p.203. 7) 미하엘 하네케의 이 영화는 평온한 삶을 누리는 중산층 가정에 갑자기 자신들의 일상사를 찍은 비디오테이프와 섬뜩한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 배달되고,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배달되는 비디오테이프와 그림은 점점 더 그들의 은밀하고 사적인 생활들에 관한 내용과 결부되고 그들의 불안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에서 누가 범인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럽 부르주아 일상에 끼어든 갑작스럽게 드러나는 이런 공포와 두려움은, 개인적으로는 억압된 무의식(죄의식)의 귀환 혹은 사회적으로 알제리에 대한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로 일반화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범인은 무의식 혹은 죄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8) ‘되기’는 들뢰즈적 개념이지만, 그 원본은 니체에게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도덕이나 법률, 제도는 아이의 행동을 심판할 수 없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을 뿐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 그는 비도덕적 존재이다. 그것은 그가 악한 존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도덕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중략) 사자에게는 힘든 전투였던 것이 아이에게는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아이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굴러가는 바퀴인 것이다.(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p.291.